반달 그림책에서 나온 채승연 작가의 이 작품은 2019년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했다. 볼로냐 라가치상은 매년 세계 규모인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출품 그림책 중 예술성과 창의성이 뛰어난 책에 주어지는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상이다. 채승연 작가는 신인상에 해당하는 작가의 첫 작품에 주어지는 부문인 오페라 프리마 부문에 선정되었다.
기다린 그림자 하나
기다란 그림자 책의 첫 장은 기다란 그림자가 하나로 시작한다. 그림자 아래에는 시원한 그늘이 새겼다. 그 그늘로 여우와 곰이 가만히 걸어 들어온다. 그 후 기린도 그림자 그늘로 아래로 들어가고, 사자도, 너구리도, 원숭이도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거북이도 그늘로 들어가려고 열심히 기어가는데, 어? 그늘이 점점 짧아진다. 작가는 함께 사는 고양이들을 생각하며 이 그림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동물과 인간이 모두 함께 어울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책이다. 처음에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마지막 장면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동물들이 차례차례 시원한 그늘 아래로 들어와 뜨거운 햇빛을 피하는데 제일 마지막에 작은 거북이 한 마리가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처음에는 기다란 그림자였는데 점점 그림자가 짧아지더니 동물들이 서로의 몸 위로 올라가 불편하게 동물 탑을 만든다. 짧아지는 그림자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가엾은 느린 거북이만 끝내 그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크고 강한 동물들이 작고 연약한 동물을 소외시키는 이야기라고 언뜻 생각이 들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궁금증을 자아낸 것은 마지막 페이지에 모래 놀이터 위에 나무로 된 동물 장난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물 나무 장난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오른쪽 구석에 걸어 나가는 누군가의 발 한쪽이 그려져 있던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나중에 출판사의 책 소개를 읽고 나서야 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느긋하게 쉬던 동물들이 옴짝달싹
그림자 안으로 모여들던 동물들은 세상 편안한 자세와 몸짓으로 시원한 그늘을 느긋하게 즐긴다. 그러나 점점 그림자가 짧아지기 시작한다. 그림자는 그림책의 책장을 넘길수록 짧아지고 또 짧아진다. 자기도 그림도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던 느린 걸음의 거북이는 결국 그림자 그늘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늘 안에 있는 동물들만 바라본다. 동물들의 모습도 처음과는 다르다. 기다란 그림자 속에서 시원함을 누리던 동물들은 그림자가 짧아지자 이제는 뭔가 불편한 듯 몸을 웅크리고 자꾸만 위쪽으로 올라간다. 비좁은 공간에서 서로 간격을 좁히고 다닥다닥 붙어 서더니 나중에는 서로의 몸을 타고 올라가 탑을 쌓기 시작한다. 재주를 부리는 것 같지만 얼굴 표정과 몸짓은 전혀 여유롭지 않다. 마침내 그림자는 쥐꼬리만큼 남고 모두 사라진다. 자리에 있었던 동물들은 탑이 되어 우뚝 섰다. 이 그림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림자의 정체
그 림자의 정체는 바로 마지막 장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늘의 정체는 바로 나무 그늘이 아니라 '나무 조각 그늘'이었다. 상상력과 추리력이 발달한 독자라면 눈치 챌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아이의 동심을 잃은 지 오래여서 그림책을 한 장 한 장을 너무 성의 없이 넘겨버린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장을 보면 누군가가 모래 놀이며 기차놀이를 한 것 같은 놀이터에 나무로 만든 동물조각이 탑이 되어 높이 섰고, 오른쪽 끝에는 막 자리를 뜨려 하는 아이의 발이 있다. 그동안 우리가 보았던 동물들은 아이의 나무 장난감이었고, 시원한 나무 그늘은 모래 놀이터에 박아 놓은 나무 조각이었다. 아이는 해가 낮게 떠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오전 이른 시간부터, 해가 높이 떠서 그림자 길이가 짧아지는 점심 무렵까지 나무 동물들과 즐겁게 놀며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떠나고 나무 동물 장난감 위에는 동그랗고 넓은 그림자 하나가 새로 생겼다. 누구나 아이의 따뜻한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림 속 아이라면?
여기서부터 독자들은 각자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만약 내가 그림책 속 아이라면, 동물들이 쉬던 시원한 그늘이 사라진 자리에 뜨거운 햇빛마 가득하다면, 동물들이 손톱만 한 그늘에서 서로 탑을 쌓아가며 옴짝달싹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단순히 놀이터 위에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아닌 실제 우리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물과 인간에 빗대어 의미를 확장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림책은 아이들에게도 예쁜 그림과 간단하고 단순한 문장으로도 재미와 감동을 물론 삶의 교훈을 주는 이점이 있지만 성인들에게도 충분히 감동과 읽을 만한 가치와 의미를 전달한다. 특히 수많은 지식과 혼탁한 세상의 먼지로 순수함이 많이 흐려진 나 같은 성인들에게는 이 책의 마지막장에서 같이 앗?! 하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신선한 반전과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준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잔잔한 재미를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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