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카레 여행 에세이
이 책은 카레에 대한 에세이다. 이번 여름휴가로 남편과 도쿄 여행을 가기로 계획했는데, 일본에 가서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리다 마침 책장에 꽂혀 있던 이 책이 생각나서 오랜만에 다시 펼쳐보았다. 주로 도쿄 여행을 하면서 맛본 카레 이야기가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고 카레에 대한 작가의 경험과 생각, 카레와 함께하는 일상과 카레 식당 정보들을 담고 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적당한 크기와 가방 안에 쏙 넣어 다니면서 읽기에도 전혀 부담 없을 가벼운 무게, 카레를 연상시키는 샛노란 색의 예쁜 겉표지 디자인은 이 책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돕는다.
도쿄에서 만난 열두 가지 카레 이야기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은 도쿄에서 만난 열두 가지 카레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예쁘고 아기자기한 일러스트가 삽입되어 있다. 카레는 물론이고 도쿄 카레 여행 지도까지 그림으로 나와있다. 작가도 말했듯이 이 책은 여행 가이드북이나 맛집 리뷰와는 다르게 가격, 교통편, 접근성과 같은 세밀한 정보보다는 카레를 먹으러 가기 전의 설렘, 가게를 들어섰을 때의 느낌과 분위기, 그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 카레를 먹으면서 느낀 감정과 생각들을 기록했다. 그것도 아주 잔잔하고 차분한 말투로 전달한다. 나는 작가가 실제 찍은 카레 사진과 그린 카레의 싱크로율이 너무 똑같아서 계속 번갈아가며 비교하면서 보았다.
카레에 미친놈
작가는 카레를 먹을 때마다 자신이 직접 제작한 '채집 카드'를 작성한다. 그 날의 날짜, 시간, 식당 주소, 카레 이름, 가격은 물론이고 카레를 먹은 날의 날씨, 기분, 숟가락질 방법과 그 횟수까지! 그리고 자신이 느낀 카레의 맛을 기록한다. 이 정도면 진정 카레에 미친놈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덕후가 성공하는 요즘 시대에 나는 이런 마니아들이 부럽다.
카레의 효능
카레가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카레가 나오는 일본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중략}
<리틀 포레스트 : 겨울과 봄>에서 주인공 이치코와 친구 키코는 다툰다.
다음날, 키코는 인도풍 스파이스 카레를 한 냄비 들고 이치코의 집에 간다.
"카레를 만들어 왔어, 같이 먹자."라며 말문을 연다. 카레를 데우고 밥을 짓고, "어제는 미안했어."라 말한다.
카레가 없었다면 둘은 화해할 수 있었을까.
카레 덕분에 둘은 화해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중략}
카레는 우리가 솔직해지도록,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가 믿는, 카레의 효능이다.
(본문 193쪽 - 195쪽)
영양 성분을 나열하는 요리 서적이나 건강 의학 서적에서 말하는 카레의 효능이 아니다. 영양학이나 의학적 지식을 쏙 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또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써먹을 수 있는 효능을 말하고 있다. 음식은 묘한 능력이 있다. 남편과 대판 싸우고 화를 좀 식히려 동네 시장 뒷골목을 돌다 집에 들어와 툭탁툭탁 부엌에서 음식을 만든 적이 있었다. 바삭하고 노릇하게 구운 참치김치전을 뽀로통한 얼굴로 내밀었다. 남편이 삐죽 한 번 쳐다보더니 말없이 받아먹는다. 그다음부터 우리는 같이 젓가락질을 하며 언제 싸웠냐는 듯 종알종알 떠들기 시작했다.
커리의 힘
작가는 '스파이스 쿠라시'(우리말로 향신료 삶, 향신료 생활)이라는 가게에서 카레를 먹으며 '쓸쓸함'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면서 영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에서 주인공 수짱이 느끼는 쓸쓸함에 대해 공감한다.
수짱은 슈퍼마켓 채소 진열대의 낱개 무 포장을 보며, '앞으로 혼자 살다 돈도 없고, 일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게 된 채로 늙으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한다. 수짱의 쓸쓸함에는 두려움이 포함되지 않았을까. {중략} 다음으로는 혼자 있는 내가 눈에 들어온다. '이젠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는 직장이 없으니 결혼하긴 더 힘들겠지. 직장이 없으니 소개팅도 안 들어오겠지. 이렇게 늙다 일도 없어지고, 돈도 떨어지고, 의지할 사람도 없으면 어떻게 될까?'를 고민했다. 영화 속 수짱 마냥 쓸쓸함 기분을 느꼈다. (본문 71쪽 - 78쪽)
그러나 스파이스 쿠라시의 커리를 먹을 때만큼은 '쓸쓸함'을 느끼지 않았다. 가게 사장님의 멋진 삶의 모습을 보고 위안을 얻는다. 이 모든 것이 커리의 힘이라고 믿고 있다. 다음에는 연인과 함께 오고 싶다며, 가게를 나와 거리를 걸을 때 쓸쓸함을 느끼고 싶지 않다며 눈물을 머금는 작가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커리의 힘이 존재한다면 아마 지금쯤 연인과 함께 카레를 함께 떠먹으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요시다 카레
바 좌석에 달리는 수컷 말 세 마리의 얼굴은 상기되어있다. 마법에 홀린 듯 접시에 시선을 고정하고, 턱을 빠른 속도로 움직여 밥을 씹는다. 영화 <록키>에 나온 서바이버(Survivor)의 'Eye of the tiger'가 배경음악으로 어울릴 만한 모습이다. 두 마리 말의 모습을 보면, 다른 노래가 떠오른다. 느린 화면을 보듯 천천히 숟가락을 젓는, 카레를 입에 넣고 음미하는 모습에는 영화 <불의 전차> 주제곡인 발젤리스(Vangelis)의 'Chariot of Fire'가 어울릴 듯하다. (본문 133쪽)
주인장 말에 고분고분 순종해야 카레를 먹을 수 있는 '요시다 카레' 식당에서 본 광경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갑자기 입체 사운드 북이 된 것 같았다.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영상을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숫자로 보는 카레 생활
숫자로 보는 카레 생활에서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한 해에 323회 카레를 먹었다. 이 정도면 똥 색도 노란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 카레 식사 비용은 1,714,300원. 한국에서 카레를 먹은 횟수는 290회, 일본에서는 33회, 카레 먹은 날의 날씨 중 맑은 날은 229회, 흐린 날은 62회였다. 카레 한 그릇당 평균 숟가락질 횟수는 19회며 숟가락질이 가장 많았던 카레는 공기식당의 치킨 그린커리로 35회다.
느낀 점
카레라면 오뚜기 카레가 제일 익숙하고 맛있다고 생각하던 나에게 '카레 덕후란 이런 것이다.'라고 각인시켜 주었다. 카레 꽤나 좋아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카레 덕후의 세계에 빠질 수 있도록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카레 덕후의 경지에 다다랐다면 반가운 친구와의 깊은 만남을 기대할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저마다의 작고 확실한 행복을 찾아가는 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따뜻한 카레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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